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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성훈의 언플러그드] LPGA의 ‘4’에 대한 집착
‘그랜드슬램(Grand Slam)’에 대한 논란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일부 해외 언론사들이 미국 여자 프로골프를 관장하고 있는 LPGA의 ‘유권해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박인비의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와 미국 <골프채널>은 13일 끝난 2015 에비앙 대회 내내 박인비 앞에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노리고 있는’이라는 수식어를 달며 그의 ‘그랜드슬램’ 달성을 부정했다. 박인비가 올 에비앙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기에 이들은 박인비가 에비앙대회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렇게 쓸 것으로 보인다. 이들 언론사는 ‘그랜드슬램’는 모든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4개 메이저 대회가 5개로 늘어난 현 체제하에서는 5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해야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것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반면, LPGA는 “그 동안 4개 대회에서 우승할 경우 ‘그랜드슬램’으로 널리 인정해왔기 때문에 메이저 대회가 5개로 늘어났다 해도 4개 대회 우승을 ‘그랜드슬램’으로 부를 수 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왜 이렇게 다를까? 와 <골프채널>은 ‘사전적 의미’로, LPGA는 숫자 ‘4’에 각각 그 방점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자. <메리엄 웹스터>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전은 ‘그랜드 슬램’을 스포츠 분야의 경우 “테니스, 골프 등에서 한 선수가 그 시즌의 모든 메이저 대회를 제패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 말은 브릿지(bridge)라는 카드 게임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세기 이후 브릿지에서는 13차례의 모든 게임에서 이기는 것을 의미했다. 이후 야구에서 1929년 만루의 상황에서 홈런을 쳤을 때 ‘싹쓸이’라는 개념으로 이 용어가 사용됐다. 즉, ‘그랜드슬램’은 ‘완전한 승리’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박인비는 아직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게 아니라는 주장이 맞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유럽에서 매년 열리는 ‘럭비 챔피언십 대회’에서 찾을 수 있다. 5개국이 참가했을 때는 4전 전승을 ‘그랜드슬램’이라 불렀다. 그러나 6개국이 참가한 2000년부터는 5전 전승을 ‘그랜드슬램’이라고 칭하고 있다. 즉, ‘그랜드슬램’은 경기 수에 관계없이 모두 이겨야 붙여지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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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에비앙 대회에서 '진짜 그랜드슬램'에 실패한 박인비.


그러나 LPGA의 해석은 다르다. LPGA는 예전에 메이저 대회가 2개 또는 3개였을 때에는 이 대회들을 석권했다 해도 ‘그랜드슬램’으로 부르지 않았다. 메이저 대회가 4개로 늘어났을 때부터 이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후 2012년까지 4개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이 용어가 사용되었다. 숫자 ‘4’가 곧 ‘그랜드슬램’으로 정착된 셈이다. 결국, LPGA는 숫자 ‘4’에 집착하다 보니, 메이저대회가 5개로 늘어났다 해도 4개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그랜드슬래머’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랜드슬램’에 대한 해석이 분분하자 박인비가 올 브리티스오픈 우승 후 갑자기 ‘국적’을 들먹이며 불만을 터뜨렸다. 자신이 미국인이 아니어서 이런 논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박인비의 과민반응이라고 본다. 논란의 본질은 ‘국적이 달라서’가 아니라 ‘그랜드슬램’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이다. 박인비는 자신도 처음에는 5개 메이저 대회를 전부 우승해야 진정한 ‘그랜드슬램’이라고 생각했다고 기자회견을 통해 밝혔다. 이는 박인비 본인도 이런 논란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박인비가 그런 생각을 했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논란이 일게 된 것이다. ‘국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실 이 논란은 2013년에도 있었다. 박인비가 그 해 브리티시오픈을 앞두고 3개 메이저대회를 석권해 브리티시오픈만 우승하면 ‘그랜드슬램’을 달성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해 에비앙대회가 메이저 대회로 승격되는 바람에 4개였던 메이저대회가 5개로 늘어나고 말았다. 그러자 박인비가 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해도 진정한 ‘그랜드슬램’이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박인비가 아쉽게 우승을 못하는 바람에 이 논란은 수면 아래도 가라앉았지만, 그가 올 해 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하자 논란이 다시 불거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도 박인비의 ‘국적’ 때문에 그런 논란이 일어났을까? 박인비의 그 같은 발언은 자칫 ‘피해의식’에서 나온 것이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차라리 “저도 한 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어떡하죠? LPGA가 ‘그랜드슬램’이 맞다고 하는데”라며 LPGA에게 물어보라는 식으로 넘겼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나저나 어느 쪽 주장이 타당할까? 예를 들어, 필자가 어떤 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자. 2012년까지는 시험 과목이 4개였다. 4개 과목에서 모두 과락을 면해야 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독 한 과목 때문에 번번이 떨어졌다. 그런데 2013년부터 갑자기 과목이 하나 더 늘어났다. 필자는 어떻게 해야 고시에 합격할 수 있을까? 당연히 5개 과목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다소 억울한 면이 있지만 어쩔 수 없다. 고시 합격에 대한 정의가 ‘모든 과목에서 과락을 면해야 한다’면 말이다. 따라서, ‘그랜드슬램’에 대한 정의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본다.

결국, ‘그랜드슬램’ 논란의 중심에는 LPGA의 ‘자의적 해석’이 자리잡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LPGA는 이에 대한 해석을 다시, 그리고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사전들이 ‘그랜드슬램’에 대한 정의를 다시 써야 할 텐데, 과연 그들이 그렇게 할까? 쓴다면 “단, LPGA에서는 대회 수에 관계없이 4개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하면 됨”이라는 말을 추가할 것으로 보인다. Sean1961@naver.com

*필자는 미주 한국일보와 <스포츠투데이>에서 기자, 체육부장 및 연예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스포테인먼트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sports@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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