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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란한 여왕ㆍ국정농단기, 최치원과 미탄사 미스테리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최치원(857~?)은 통일신라시대 행정 및 국제 감각이 뛰어난 천재 문신이자 문장가, 지략가이다. 그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벼슬을 할 때 지은 ‘토황소격문’은 동아시아에서 최고 반열로 꼽히는 명문장이다.

그는 17년간의 당나라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펼쳐보려 했으나 국정농단 속에 꿈을 이루지 못했다.


최치원 초상 [헤럴드사진DB]

스스로 지방관을 자처해 전전하다가, 외척의 국정농단과 진성여왕의 문란한 사생활 등 망조가 든 나라꼴을 보고 참지 못해 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올리기도 했다.

여왕은 그러나 최치원이 건의한 내용은 전혀 실천하지 않은 채, 최치원의 벼슬만 최고 귀족인 아찬으로 올려주고는 다시 국정농단세력과 정부(情夫)의 품에서 헤어날 줄 몰랐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이 살던 황룡사 남쪽의 자택은 나중에 미탄사(味呑寺)라는 절이 된다. 창건 취지, 연대나 폐사 시기 등은 알 수 없다. 직역하면 ‘맛을 삼키다’이지만 아무도 이에 대한 해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최치원의 죽는 과정 역시 역사의 비밀로 가려져 있다. 그래서 미탄사는 ‘수수께끼의 절’로도 불린다.

문화재청은 황룡사(黃龍寺) 남쪽이라는 기록에 따라 현재 황룡사지 남쪽 200m의 경주시 구황동 433-1번지에 위치한 삼층석탑 주위를 미탄사지(味呑寺址)로 추정하고 있다.

1980년 국립경주박물관이 실시한 발굴조사로 기와편, 토기편, 석재 등이 출토되었으나, 토층의 교란이 심하여 사찰 영역은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파괴된 탑재(塔材)를 모아 삼층석탑으로 복원하였는데, 9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된다.

미탄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석탑양식이 변화하는 과도기적 요소를 지닌다.

석탑이 제작된 것으로 짐작되는 9세기 혹은 10세기 초에는 앞 시대보다 석탑의 크기가 줄어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흐름과 달리 드물게 규모가 큰 편이다. 외국생활을 오래한 최치원과 그의 측근들이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대로 지은것은 아닐까 하는 억측도 나온다. 최치원의 아버지는 중요 사찰 창건에 관여한 바 있어 최치원도 사찰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11일 보물로 지정된 미탄사지 삼층석탑

문화재청은 11일 ‘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慶州 味呑寺址 三層石塔)’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 제1928호로 지정했다.

최초로 신라석탑 기초부의 형식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조사를 실시한 석탑이라는 점과 그 형태가 정연하고 적절한 비례감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크다고 문화재청은 설명했다.

특히, 일반적인 석탑의 판축(板築)기법과 달리 잡석(雜石)과 진흙을 다져 불을 지피는 방식으로 한 단이 완성될 때마다 굳히면서 쌓아나가는 기초부의 판축 축조방식을 사용한 점이나 기단부 적심(積心) 내에서 지진구(地鎭具)가 출토된 점 등 특이하고 학술적인 의미가 있어 한국석탑에 관한 연구에 실증적 자료로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한다.

어쨋든 이 터의 주인인 최치원과 미탄사는 모두 의문투성이인 채로 남아있다. 국정농단과 통치권자의 문란한 생활이 이어지면서 신라가 서서히 멸망하던 시기였기에 ‘의문’에 대한 호기심은 커진다.

abc@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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