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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더스카페] 종이로 옷을 삼고 벼슬 마다한 참선비 성혼
[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말 업슨 청산이오 태 업슨 유수로다/갑 업슨 청풍이오 님 업슨 명월이라(말이 없는 푸른 산이요 일정한 모양이 없는 흘러가는 물이로다/돈을 낼 필요가 없는 시원한 바람이요 임자가 없는 밝은 달이라)’

조선 중기 학자 성혼(1535~1598)의 잘 알려진 시조다. 자연 속에서 걱정 없이 표표히 살아가는 모습을 담고 있지만 그의 삶은 지난했다. 재야에 머물며 ‘깨끗한 은자’를 고집했던 조부의 영향으로 생활은 궁핍했고, 그 자신 환곡을 받지 않으면 봄철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였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종이로 옷을 만들어 입을 정도여서 친구에게옷을 부탁하는가하면 병을 달고 살았다. 그래도 성혼은 수십차례 거듭된 임금의 부름을 거절하고 부귀영화를 멀리한 채 파주의 오두막집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우계 성혼 평전/한영우 지음/민음사

성혼은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후기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지만 그의 삶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국사학자인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쓴 우계 성혼 평전’(민음사)은 성혼의 인간적인 참모습을 드러내는데 집중했다. 선비의 기개를 지녔던 집안의 전통과 그의 의식주 생활, 건강, 이이와의 교유 등 삶의 구체성에 초점을 맞췄다.

한 교수에게 ‘성혼 평전’은 자연스런 수순이었다. 직전, 유학자 평전 시리즈 중 이이의 평전을 낸 그로서는 이이와 실과 바늘의 관계인 성혼을 빼놓을 수 없었다. 둘은 쌍벽을 이루며 선비 사회에서 높이 추앙받았지만 후대에 알려진 성혼의 흔적은 찾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저자는 이유를 그의 인간적인 참모습이 전해지지 않은 데서 찾는다.

성혼은 이이와 마찬가지로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이상사회를 만들어 백성이 편안하고 도덕이 꽃피는 나라를만드는데 평생을 바쳤다. 일찌기 엘리트 코스를 밟아 벼슬길에 오른 이이와 달리 성혼은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과거시험도 외면했다. 그래도 선조는 곁에 두고 싶어 거듭 벼슬을 내렸지만 성혼은 받지 않았다. 1579년에는 선조가 광흥창 주부를 내리자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개혁을 요청하는 긴 문장의 사직소, ‘기묘봉사’를 올렸다. 성혼은 현실 정치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걸 문제삼았다. 선조가 독단적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선비를 경시하고 자신만의 생각만 내세우기때문에 인심이 따르지 않는다고 쓴소리를 했다.

이런 폐단을 바로 잡으려면 공부하라고 다그치기도 했다. 사서를 배워 자신을 극복하고 예를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

성혼은 임진왜란 중 망명을 준비중인 선조 대신 국사를 맡고 있던 광해군에게도 학문하는 방법과 15조항의 ‘시무편의’를 지어 올렸다.

아무리 국가가 지금 위태로운 시기를 만났어도 유신들을 자주 만나 서책을 읽고 의리를 강구하여야 옳은 정치를 펼 수 있다고 충언했다. 정예병 조직, 인재등용, 서얼금고 폐지, 엄한 군법 시행 등 난리 중에 당장 시행해야할 15가지를 제시했다.

벼슬도 없었지만 성혼에겐 모함이 늘 뒤따랐다, 한 번은 이이가 병조 판서 시절, 실수를 저질러 동인의 거센 공격을 받자 발벗고 나서 그를 구원했다. 그러자 일부 동인이 성흔이 서인들과 작당해 권력을 농단했다고 공격했다.

책은 성혼과 이이의 교유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파주에서 만난 둘은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치열하게 논쟁했고 서로의 학문을 발전시켰다. 정치적, 학문적 동지였던 둘은 당대를 위기로 인식하고 여러차례 만언에 달하는 장문의 상소와 직언으로 인재등용, 공남제도 개선 등을 한 목소리로 주창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성혼의 참선비의 삶을 오롯이 복원함으로써 역사의 빈 공간을 채웠다.

/meel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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